1.
열흘이 넘게 귀가 멍하고 집중력이 떨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른쪽 귀에서 압력이 느껴지고, 점점 커지는 백색소음같은 것에 시달리고 있을 때
유일하게 집중할 수 있는 일은 그림을 그리는 것 뿐이었다.
어제 굉장히 아픈 침을 맞고, 뜸을 뜨고야 정신이 좀 돌아왔다.
2.
유스보이스로 알게된 10대소년이 20대 청년이 되어 만났다.
저녁밥이나 한번 먹자고 이야기하던 차..어렵게 잡힌 약속이었다.
한의원에서 나와 몸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안그런척 하며 만났다.
인디씬에서 영화작업하고 있는건 알고 있었고, 아무리 자기 최면을 걸어도 단어 그대로 "각박"한 현재의 상황은 적잖이 버거운 무게를 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도시에 살면서 고용상태가 유지되거나, 다양한 경로로 경제력이 받쳐주고 있거나, 신분이나 지위가 분명하여 안정감을 갖고 사는 사람들은...
꽤나 흔해진 정해진 규칙에 맞춰 사는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자율적으로 삶의 방향을 결정할 수 있는 사람들은 흔치 않아도 가치있는 삶이 아닐까라고 하는 아주 막연한 이미지랄까.
오랜만에 마주한 26세가 된 도시의 청년이 공감가는 말을 해주었다.
"원하는 것을 스스로 택해서 살고, 그 방식을 즐길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30대 초반까지 반드시 해내야 하는 것이 이미 정해져 있더라구요. 즐기기 보다는 뭔가 어떤 규칙같은 것이 있어서 하나씩 클리어하고 있는 느낌...?"
나의 컨디션이 메롱메롱하여 참 어리석고 하찮은 질문을 내 뱉고 있었다.
"그건 어느정도 각오했던것 아니었어?"
쳇. 그게 질문이냐.
맞다. 영화작업을 위해서는 학습할 수 있는 선배나, 협업할 사람이 필요하다. 그 사람들이 도시에 모여있기 때문에 도시를 떠나는 것이 힘들다. 그렇게 도시에 살아야 하는데, 최소한의 경제력을 유지하면서는 정작 하고 싶은 일로 부터 멀어진다는거...
더이상 미룰 수 없는 병역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양심적 거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병역거부를 한다해서 정작 피하고 싶은 파시즘과 기분 더러울 남성집단문화의 폭력은 빗겨갈 수 없다. 군대나 감옥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말이다.
이걸 하나씩 클리어하면 얻을 수 있는 건 있을까. 그건 살아봐야 알게되는 것이기에 이 대화속에서 조선땅에서 생존하는 20대의 무력감과 피곤이 밀려왔다.
3.
나의 엔돌핀 조마리가 대학원에 합격했다며, 아침에 쪽지가 날아왔다.
멍멍한 귀가 뚫리는 기분. 정말 기쁘다.
마리. 20대에 뭔가 하나 클리어했구나.
재밌고도 놀라운 말을 했다.
"저는 재능이 있으니까 이제 노력만 하면 돼요"
뭔가 하나 발견한 것 같다. 도시에 살면서 이제 분명한 신분적 정체를 확보한것에 대한 기쁨이나, 합격통지의 달콤한 쾌감...같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마치 중독성 강한 자극적 물질 같다.
마리가 클리어한건 새로운 관문을 통과하거나, 단기적으로 보장된 안정성확보 따위는 아니었다는게 참 좋았다.
4.
옳고 그르다의 이야기를 하는 건 참 "옳지"않은 경우가 많다.
새로 자기 계획을 세워야 하는 경우,
무엇가 달성해서 다른 삶이 열린 경우,
필요에 따라 유보해야 하는 자기 시간을 할애해야할 경우,
만족할 만큼의 성과를 얻었다고 생각하지만 하찮을 경우....
N개의 삶이 있기 때문에 옳은 판단이었다고 속단하는 건 참 옳지 않더라.
지금 현재의 고민이 참 소중한 재산이 될 것이란 걸 알기 때문이다.
난 무엇을 클리어했으며, 앞으로 무엇을 클리어하며 살아야 할까...라고 생각해 보니...
오늘 공기가 참 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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