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2월 4일 화요일

가족은 언제나 나에게 불편했다.

이번 설에 가족들하고 한판 붙었다. 
특히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독립해서 집을 나온것을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날 독립시켰다고 말하셨다. 
난 발끈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서 나온건 부모님이 평생을 싸우다가 끝내는 자살소동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평생 의처증으로 어머니를 의심했고,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맞고 사는 걸 봤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늘 주눅들어 있었고, 공포에 시달렸다. 
어린 나는 그런 공포의 순간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컸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두분에게 이혼을 권했다. 말할 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저렇게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고 무서워하면서 함께 사는 것의 부적절함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부부의 이혼은 내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생이 된 이후 독립적으로 사고 하고 독립적으로 살았다. 
그저 한국의 정서상 공식적인 독립이란 결혼이었다. 
도피를 위해 결혼할꺄 수도 없이 고민했다. 결혼상대로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건강한 가정의 이미지가 생겨나질 않았다. 
도피의 수단으로 한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몇번의 시도는 그냥 없던 일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혼자 살아간다. 
어느날이었다. 
여전히 어머니를 의심한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하자 어머니는 못참겠다며 아버지와 함께 자살하자고 제안했다. 
자살...
부모의 자살...
자식의 가슴에 못박겠다는 결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비극의 연속이었던 우리 집안에서는 그리 큰 일도 아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은 독약을 아버지에 입에 구겨넣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는 어머니를 쉼터로 일단 모셔다 드렸다. 

쉼터에서 어머니를 만나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더 이상 두분의 관계에 끼어들지 않겠다. 
이혼을 권했다. 

그리고 나는 네팔로 떠났다. 한달간의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확실히 떨어져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여름 대림동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어렵게 독립했거늘...

난 짜증과 분노가 폭발했다. 
어머니가 내 독립을 준비시켜 날 보냈다고 말하는 걸 듣자니 참을 수 없었다. 

가족...진짜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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