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새가 전깃줄에 앉아 있다.
블라 블라 블라...
더 이상 이런 시리즈 농담이 나오지 않는 이유?
사람들이 카페나 술집에서 그런 유머를 구전으로 공유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웹이나 메신저가 대신하고 있고...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듣는 순간 공유된다. 말로 전하면서 이리 저리 변형 조합되는 유머가 사라진 이유다.
그건 마치 성냥개비로 탁자위에 놓으면서 놀았던 수수께끼와 같다.
성냥문화도...카페에서 노닥거리며 시간을 보내던 문화도...사라져간다.
골목 안쪽의 다방이나 젊은 이들이 파르페(?)를 마시면서 비 생산적으로 시간을 때우며 즐거운 젊은 날을 만끽하는 그런 문화는 없다.
카페의 한쪽에 놓여있던 팔각성냥을 볼 수 없다. 그 성냥개비 수수께끼는 스타벅스에서 재현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2014년 2월 21일 금요일
2014년 2월 15일 토요일
2014년 2월 10일 월요일
도구 사용의 유연성
난 어려서 부터 도구 사용에 대해서는 매우 유연한 편이었다. 손/얼굴/발수건을 따로 쓰는 집안의 문화에서도 그냥 과감하게 혼자 구분없이 쓰며 살았다. 아마 이 사실을 우리 가족들이 안다면 엄청난 배신감이 들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자라면서 이 유연성은 더 커졌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서양애들이 담배피우다 자기가 먹던 커피잔에 던져 넣어 끈다거나 하는 걸 보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먹는 것에 담배재를...이라며 경악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런다. 별 문제없다. 어차피 설거지로 깨끗하게 해결될 것이고 오히려 먹다남은 음식보다는 담배꽁초가 더 깨끗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컵은 쓰레기 통이 될 수 있고, 쓰레기를 담던 그릇은 맛있는 음식이 담겨도 된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아인슈타인이 친구만나러 가는데 추워서 집에 있는 커튼을 목도리로 감고 집밖으로 나갔다는 말을 듣고 나 혼자 심하게 공감한 적이 있었다. 그게 문제가 될 턱이 없었다. 커피드리퍼에 과일을 씻어 담아 먹으면 물이 밑으로 빠져서 편리하다. 그 용도가 커피만으로 한정될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덕분이다. 이런 내 버릇 덕분에 두개의 이질적인 재료들이 상호작용하는 것에 대한 자연스런 태도가 생겼다. 그래서 일할 때 컨버전스나 크로스오버도 자연스러운 모양이다. 이런 유연성은 내 일상과 관련된 것이지 절대 배워서 가능한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은 나에게 이런 유연성과 전화된 발상을 가르쳐 달라고 하는데 돌아버리겠다. 그래서 내가 강의할 때 가르쳐 주어야 하는 것은 당신의 일상을 들여다 보라...그래서 나와 같은 일상적 습관을 가진 사람들은 크로스오버가 가능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스트레스상황을 만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해주기로 했다. 어차피 안될거 너무 힘들게들 산다.
2014년 2월 6일 목요일
드라마트루기
혼자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은 힘들고 객관성이 결여된다. 소사이어티는 아주 작은 단위의 결함을 스스로 견고하게 만들기 위한 다양한 방식의 룰과 방법론을 만들어내곤 했다. 그 중 하나가 집단이 하나의 문제 또는 상황을 입체적인 방식으로 고려하는 것이다. 연극에서는 드라마트루기dramaturgy라고 부른다. 극작을 위해 조금 더 객관화된 서사구조, 즉 관객의 관점으로 보는 방법론이라고 할 수 있다.
2014년 2월 4일 화요일
가족은 언제나 나에게 불편했다.
이번 설에 가족들하고 한판 붙었다.
특히 어머니.
어머니는 내가 독립해서 집을 나온것을 자신의 의지라고 생각하고 계셨다.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날 독립시켰다고 말하셨다.
난 발끈했다.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집에서 나온건 부모님이 평생을 싸우다가 끝내는 자살소동을 피우는 장면을 목격했다.
아버지는 평생 의처증으로 어머니를 의심했고,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맞고 사는 걸 봤다.
아버지가 집에 계시면 늘 주눅들어 있었고, 공포에 시달렸다.
어린 나는 그런 공포의 순간을 탈출하고 싶다는 생각만 하며 컸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두분에게 이혼을 권했다. 말할 순간이 되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저렇게 서로 의심하고 미워하고 무서워하면서 함께 사는 것의 부적절함에 대해 말했다.
하지만 부부의 이혼은 내 선택이 아니었기 때문에 대학생이 된 이후 독립적으로 사고 하고 독립적으로 살았다.
그저 한국의 정서상 공식적인 독립이란 결혼이었다.
도피를 위해 결혼할꺄 수도 없이 고민했다. 결혼상대로 있었다.
그런데 나에게 건강한 가정의 이미지가 생겨나질 않았다.
도피의 수단으로 한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것을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결국 몇번의 시도는 그냥 없던 일이 되었고, 나는 여전히 혼자 살아간다.
어느날이었다.
여전히 어머니를 의심한 아버지가 폭력을 휘두르고 폭언을 하자 어머니는 못참겠다며 아버지와 함께 자살하자고 제안했다.
자살...
부모의 자살...
자식의 가슴에 못박겠다는 결정이기도 했다.
하지만 평생 비극의 연속이었던 우리 집안에서는 그리 큰 일도 아니겠다 싶은 생각도 들었다.
집에 들어갔을 때 어머니는 미리 준비해놓은 독약을 아버지에 입에 구겨넣고 있었다.
그 장면을 보고는 어머니를 쉼터로 일단 모셔다 드렸다.
쉼터에서 어머니를 만나 마지막으로 말했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다.
더 이상 두분의 관계에 끼어들지 않겠다.
이혼을 권했다.
그리고 나는 네팔로 떠났다. 한달간의 여행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나는 결심했다. 이제 확실히 떨어져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 여름 대림동으로 이사했다.
그렇게 어렵게 독립했거늘...
난 짜증과 분노가 폭발했다.
어머니가 내 독립을 준비시켜 날 보냈다고 말하는 걸 듣자니 참을 수 없었다.
가족...진짜 모르겠다.
피드 구독하기:
글 (At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