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4일 수요일

강요된 창의력과 무감각을 조장하는 교육

문화예술교육과 창의력

1. 
  예술은 창의력의 총아처럼 여겨졌다. 그로인해 예술가는 창의적인 생산을 하는 사람이며, 그 생산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문화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고 보여진다. 예술이 창의력의 총아라는 것에 토를 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이 듣고 보고 만지는 모든것과 (또는 교감했던 사람들과)의사소통을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관점, 또는 탐미적 시선을 표현하고 나누고 싶어하는 의지로 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연이 그러하고, 인간의식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순환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미 모든 창의적 순간은 발견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 관점에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노력할 경우 창의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창의력이란, 문화적/예술적 창의력에 국한 된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창의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유를 조합한 능력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언어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시각예술에서 창의력, 수리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모든 인간은 창의적의 생각을 수시로 하면서 산다. 하지만 그것이 창의적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말할게 되는 것은 일탈에 불과하다. 인간의 역사를 볼 때 이미 창의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치 그건 물이 끓는 점까지 도달하기 까지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99도까지 액체가 열이 가해지면 잠시후 순간 기화된다. 그 1도의 온도에 박차를 가하는 힘. 그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99도까지의 열이 가해지는 "가열"이 없었다면 물이 기화될 순 없다. 가열이라는 에너지의 양적 축적이라는 측면이 무시된 채 기화는 말하기 어렵듯, 창의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지속적인 관찰의 힘, 실천의 힘,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 내는 능력까지를 가진 것이다. 

2. 
 발상을 전환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발상은 생각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개인의 문화와 역사, 사회의 문화와 역사에서 얻은 지식이나 논리와 추론들의 결합체가 발상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발상은 늘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이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뒤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발상을 전환하시면..."으로 시작되는 강의를 듣거나 아티클을 읽으면 시쳇말로 '낚싯밥을 던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생각을 시작하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도 계속되는 인간의 행위인데 이것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간혹 문화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을 만날 때 전환된 발상으로 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는가? 기존에 하던 대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무엇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하던 내용을 부러 부정하면서 이것을 새로운 발상이라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3.  

 집합적 무의식은 사람들로부터 그 시대가 최대로 필요로 하는 대상체들을 통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순간이 올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집합적 현상이 생긴다는 점. 집합적 상상력이 가져온 결과를 한 개인의 특정한 능력으로 부각시키되 되는 계기가 된다. 창의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최대수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창의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상상력을 벗어나는 창의력을 말한다.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실현했을 때 그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하는 오류는 반복되고 있다. N개의 창의력을 인류가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적시 적소에 그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은 인간의 집합적 무의식과 문화적 상상력이다. 창의성이 가진 힘을 구현해낼 때 사람들의 상상력에서 벗어 나면 변화가 어렵다. (논리에서 벗어나도 마찬가지다) 예술교육은 집단 상상력을 키우고 그에 걸 맞는 실현능력과 만나는 창의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곤 한다. 조건이 되는 몇 가지가 있다. 1) 자유를 넘어선 자율이 불편해 질 때(질서가 불편해 질 때 던지는 사회적 담론) 2) 통제를 넘어선 질서를 발견했을 때(교육이 통제될 수 있는 모듈안에 있다는 것을 버렸을때) 3) 충분한 모방으로 자기 스스로 지루해졌을 때 (양이 질을 변화시키게 되는 듯) 4) 교육은 상상력의 모티브로 존재하고, 창의력은 문화적 리터러시와 관찰력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원리를 파악할 때가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은 조화(balance)를 전제로 한다. 정답이 없다. 조화와 균형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부족하거나 과잉했을 때 양쪽 다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조화와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은 직관적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과 차분한 설 득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조화와 균형을 말할 수 있다. 예술교육의 구현방식에서 “무리하게 자세한 설명은 진부하며, 맥락없는 이미지는 모호함을 준다” 각 조화와 균형에서 설명하는 것은 두 개의 단어쌍이 상대어지만 동시에 구현되어야 하는 작업방식을 지칭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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