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2월 15일 일요일

피노키오

어려서 피노키오를 읽으면서 마음이 많이 불편했었다.
거짓말을 하면 코가 길어진다니, 얼마나 무서운 저주인가.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거짓말을 하고 싶은 걸 거야...'

아마 어린나이에 그게 가장 갑갑하게 느껴졌던 모양이다.
내 속마음을 다른 사람이 다 안다면 얼마나 힘들까.
피노키오가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자기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서 였던거다.
제페토 할아버지를 기쁘게 하고 싶다고?
사람 친구들에게 놀림받고 싶지 않다고...? 그것도 이유겠지만 피노키오에게 가장 큰 장애는 내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었을거라고 생각한거다.

집 나온 피노키오 깊은 생각에 빠지다

2013년 12월 4일 수요일

강요된 창의력과 무감각을 조장하는 교육

문화예술교육과 창의력

1. 
  예술은 창의력의 총아처럼 여겨졌다. 그로인해 예술가는 창의적인 생산을 하는 사람이며, 그 생산을 기초로 하여 다양한 문화상품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기도 한다.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렸다고 보여진다. 예술이 창의력의 총아라는 것에 토를 다는 것은 쉽지 않다. 인간이 듣고 보고 만지는 모든것과 (또는 교감했던 사람들과)의사소통을 시도한다는 측면에서 예술가의 관점, 또는 탐미적 시선을 표현하고 나누고 싶어하는 의지로 부터 출발했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자연이 그러하고, 인간의식 또한 존재하는 모든 것의 순환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에 이미 모든 창의적 순간은 발견에 가까운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창의적 관점에서 무엇인가를 하기 "위해서" 노력할 경우 창의력이 생기는 것은 아니란 뜻이기도 하다. 문화예술교육에서 창의력이란, 문화적/예술적 창의력에 국한 된 것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 창의력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능력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며, 유를 조합한 능력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언어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이 있고, 시각예술에서 창의력, 수리적 창의력을 가진 사람도 있다. 모든 인간은 창의적의 생각을 수시로 하면서 산다. 하지만 그것이 창의적이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남들이 하지 않는 것을 말할게 되는 것은 일탈에 불과하다. 인간의 역사를 볼 때 이미 창의력으로 세상을 변화시킨 사례를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마치 그건 물이 끓는 점까지 도달하기 까지의 이야기와 흡사하다. 99도까지 액체가 열이 가해지면 잠시후 순간 기화된다. 그 1도의 온도에 박차를 가하는 힘. 그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해서 99도까지의 열이 가해지는 "가열"이 없었다면 물이 기화될 순 없다. 가열이라는 에너지의 양적 축적이라는 측면이 무시된 채 기화는 말하기 어렵듯, 창의력을 갖게 된다는 것은 지속적인 관찰의 힘, 실천의 힘, 그리고 그것을 조합해 내는 능력까지를 가진 것이다. 

2. 
 발상을 전환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발상은 생각을 시작하는 지점이다. 개인의 문화와 역사, 사회의 문화와 역사에서 얻은 지식이나 논리와 추론들의 결합체가 발상을 만든다. 그렇기 때문에 발상은 늘 자연스럽게 시작된다. 이 자연스러움을 거슬러 뒤집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발상을 전환하시면..."으로 시작되는 강의를 듣거나 아티클을 읽으면 시쳇말로 '낚싯밥을 던지는구나'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생각을 시작하는 것은 오늘 지금 여기서도 계속되는 인간의 행위인데 이것을 전환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좋은 생각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간혹 문화예술교육의 커리큘럼을 만날 때 전환된 발상으로 부터 무엇인가를 시작해야 한다는 강박이 우리에게 있지 않았는가? 기존에 하던 대로 하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무엇을 시작하지 않았는가? 자기가 하던 내용을 부러 부정하면서 이것을 새로운 발상이라고 강조하지 않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대목이다. 

3.  

 집합적 무의식은 사람들로부터 그 시대가 최대로 필요로 하는 대상체들을 통해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어떤 순간이 올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그 일을 하는 사람들의 집합적 현상이 생긴다는 점. 집합적 상상력이 가져온 결과를 한 개인의 특정한 능력으로 부각시키되 되는 계기가 된다. 창의력이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최대수의 사람들이 깜짝 놀라는 창의력을 요구한다. 그것은 상상력을 벗어나는 창의력을 말한다. 내가 꿈꾸고 있는 것을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꿈도 꾸지 못했던 것을 실현했을 때 그것을 창의력이라고 말하는 오류는 반복되고 있다. N개의 창의력을 인류가 가지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한 시점이다. 적시 적소에 그 창의력이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힘은 인간의 집합적 무의식과 문화적 상상력이다. 창의성이 가진 힘을 구현해낼 때 사람들의 상상력에서 벗어 나면 변화가 어렵다. (논리에서 벗어나도 마찬가지다) 예술교육은 집단 상상력을 키우고 그에 걸 맞는 실현능력과 만나는 창의력을 발휘하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곤 한다. 조건이 되는 몇 가지가 있다. 1) 자유를 넘어선 자율이 불편해 질 때(질서가 불편해 질 때 던지는 사회적 담론) 2) 통제를 넘어선 질서를 발견했을 때(교육이 통제될 수 있는 모듈안에 있다는 것을 버렸을때) 3) 충분한 모방으로 자기 스스로 지루해졌을 때 (양이 질을 변화시키게 되는 듯) 4) 교육은 상상력의 모티브로 존재하고, 창의력은 문화적 리터러시와 관찰력에서 작동되고 있다는 원리를 파악할 때가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은 조화(balance)를 전제로 한다. 정답이 없다. 조화와 균형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부족하거나 과잉했을 때 양쪽 다 균열이 생기는 것을 말한다. 조화와 균형감을 유지하는 것은 직관적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과 차분한 설 득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조화와 균형을 말할 수 있다. 예술교육의 구현방식에서 “무리하게 자세한 설명은 진부하며, 맥락없는 이미지는 모호함을 준다” 각 조화와 균형에서 설명하는 것은 두 개의 단어쌍이 상대어지만 동시에 구현되어야 하는 작업방식을 지칭 한다.

기획자의 "썰"

[한문연 강의 원고 중에서 발췌]


 문화를 삶의 양식이라고 조작적 정의를 해 본다면 일상과 문화의 관찰을 통하여 사회적 관계 안에서 성장할 수 있게 돕는 것이 문화활동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흔히 문화적 행위를 포함한 문화활동이 문화시설을 근거로 발생한다고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모든 문화행위는 삶의 근거지에서 출발하는 것이지 문화적 공간이 주어졌다고 해서 활발한 무엇을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예를 들어 학교문화를 상상해 보자. 학교에서 문화의 발생은 교실과 교실을 이어주는 복도이고, 하교길의 골목이며, 어른들의 간섭이 최소화된 자율적 공간에서 시작한다. 일상으로 그 연결고리가 된 삶의 연장선에 있지 않은 문화는 타자에 의한 조직 또는 조작에서 시작한다. 마찬가지로 문화공간은 문화환경의 연장선에서 시작한다. 문화예술교육의 근거지가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을 할 수 있을까. 우선, 문화활동은 문화공간에서 일어나는가에 대한 스스로의 질문이 필요하다. 문화공간이 충분하다면 급속하게 문화활동이 일어날까 라는 의문이다. “충분”이라고 하는 기준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게 된다. 문화적 환경과 문화공간은 연관성을 가진 것이 분명하다. 문화예술회관, 문화원, 문화의집, 문화센터 등등. “문화”라는 단어를 직접 사용하는 문화공간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더구나 지역의 국공립도서관, 다양한 규모의 갤러러, 작은도서관, 평생교육센터, 예술창작센터등 여러방식으로 존재한다. 이때 문화행위가 공간이 규정하는 것으로 출발하는가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보아야 한다. 즉, 문화행위 기준이 되는 것이 공연을 보고, 예술콘텐트로 동아리를 만드는 것 등의 단순한 패턴이 우선 연상된다면 문화예술교육의 장을 협소하게 상상하는 것에 그치기 쉽다. 문화예술교육은 기존의 교육패러다임으로 부터 벗어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 왔다. 정책과 제도, 사업등으로 만들어지다 보니 철학과 그 노력이 변질되어 보이기는 하였을 것이라고 본다. 문화예술교육매개자인 교사가 있고, 이미 생산해 둔 교육 콘텐트를 커리큘럼으로 가지고 있으며, 그 콘텐트를 소비할 학생이 있다면 가능할 것이라는 단순한 발상은 일단 제외해 두자. 모든 사람을 위한 예술이 모두에게 똑같은 내용과 형식의 문화/예술교육으로 일관성있게 제공되어야 한다는 발상자체가 비문화적, 반예술적 행위이기 때문에 말하고 싶지 않은 테마다.  

 공연시설을 운영할 주체가 어떤 태도를 가지고 일을 하는가에 따라 “문화공간”이 되는가 “대상을 만족시켜 실적을 만드는 공연시설”이 되는가로 구분된다. 문화가 형성되고 예술행위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곳은 요구에 의한 자생적 발생이고 문화예술교육은 스스로 재생산 구조를 끊임없이 생산해 낸다. 즉, 공간을 매개로 한다는 말은 그 자연스러움을 이해한 사람들로 부터 나오는 요구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지금의 문화예술교육이 발생하는 공간은 대부분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억지스러움에 더 가깝다. 더구나 지역문화가 담아낼 수 없는 (오히려 외면하는) 공간자체가 생겼다고 해서 새로운 문화가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예는 지역에서 쉽게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지역에서 몇 몇 사람들이 의기투합하여 엄청난 예산규모를 끌어들여 문화시설을 지어 놓았으나, 적당한 콘텐트를 만나지 못해 정체성자체가 흔들리는 경우는 허다하다. 

더구나 대량생산하려는 의지는 문화예술교육의 공간적 개념으로 부터 점점 멀어지게 한다. 공연 및 그와 관련한 시설을 만든다고 가정해본다. 대단위 공연장을 중심으로 하거나, 전시실을 만드는 것에 주력한다. 문화예술에 관심을 가진 불특정 다수의 개인과 집단이 함께 공연장을 사용하려고 하면 그 인원수가 가장 중요하다. 물론 큰 공연장이 때론 필요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 자생적 문화를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유는 단순하다. 보통사람이 공연장에서 소비재로써의 예술콘텐트를 향유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는 것과 마찬가지로, 경험재로써의 문화와 예술에 접근하면서 문화예술교육의 가능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균형감 있는 문화예술교육 세팅의 태도다. 교육을 통한 자발적 공연 콘텐트가 생겨났을 때 대규모 시설에서 관객을 채우느라 급급해야 하는 이유는 없다. 더구나 소규모의 교육생집단이나 동아리들의 다종 장르를 모아 발표회 형식을 만들었을 때 그 맥락없는 나열밖에 되지 않았음을 알고 있지 않은가. 문화시설이나 공연장, 예술활동이 가능한 시설을 만들 때 가급적인 소집단의 다종생산이 가능하도록 디자인 하는 것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이 문화예술교육공간 설계의 기본이다. 밴드연습실이 있다면 그 연습실을 무대로 활용할 수 있어야 하며, 천명의 객석을 확보하는 공연장 하나를 만들려면 100-200명단위의 공연장 여러 개로 분할하는 것이 프로그램을 운영하는데 적합하다. 예산이 항상 문제라고 말한다. 지금 현재 시민이 이용할 수 있는 공연장에 가보라. 초기 예산으로 각종 장비를 들여왔는데 전혀 사용하지 않아서 처분되는 장비들과, 보기에서 그럴싸 하게 포장하기 위해 준비된 것들이다. 사용자중심에 서서 공간이 확보되는 것에 주력하는 것이 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