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주호선생님을 만난건 문화예술교육진흥원이 생기고 난 후였다.
원장이라는 직책/직함의 무거움과는 좀 어울리지 않을 법한 화법을 구사했던 분이다.
외부에서 직원들을 우리식구라고 했다.
어떤 분이 진흥원 직원중에 김주호원장님의 직계가족이 있다고 말해서 파안대소했던 기억도 있다.
안에서야 어땠는지 모르지만, 외부에서는 그런 분이 좋은 리더처럼 보였던 건 사실이다.
나는 개인적인 친분이야 없었지만, 공식석상에서 만나게 되는 정도였다.
그런 이유로 김주호선생님과 관계를 맺고 있는 수 많은 사람들의 기억과 나의 기억이 다를 것이 분명하다.
나는 그분을 생각하면 맥주 두 잔이 생각난다.
어느날 뜬금없이 자기는 술을 입에도 대기 힘들다고 말했다.
무슨 맛으로 먹는지도 모르겠거니와, 술을 마시면 몸이 말을 안듣고 너무 힘이 든다는 거다.
애주가가 "난 술 안마시고도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라는 말을 듣는게 싫다고 했다.
그건 마치 술안마시는 널 동정해서 내가 안마셔주마...라는 태도라는 거다.
"맞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라고 대답을 하고는 물었다.
"근데 원장님은 술좋아하는 사람들이 어떤 기분인지 궁금하긴 하세요?"
궁금하다. 취했을 때 혀가 꼬이고 헛소리하는 것도 궁금하긴 하다...고 했다.
체내에서 알콜을 분해하는 효소를 술에 첨가해서 먹으면 간에 부담없이 알콜이 분해된다고 전했더니 그거 구하면 우선 자기에게 가져다 달라며 신신당부를 했다.
"알겠어요. 손에 넣으면 실험체 1순위에 넣어드리죠. 흐흐"라고 난 말했다.
난 술마시는 게 많이 궁금하시구나...라고만 생각하고 넘어갔다.
또 다른 어느날 무슨 워크숍이 있어서 참가했다가 저녁식사 후 차를 한잔 마셨다.
참가자들은 마지막날 저녁이라 음주가 시작되려던 시점이다.
슬쩍 빠져나와 커피숍에 갔다. 부담없는 식사자리라서도 그렇고 굳이 원장이 있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기도 했을 것 같다.
또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술 얘기가 다시 나왔다.
맥주 두 잔 얘기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한국사회의 음주문화가 얼마나 더럽고 치사한 서열의식으로 물들어 있는지 왜 모르겠는가.
음주가 힘을 과시하고 왜곡된 동료의식을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하게 되는데 거기서 소외되고 있는 것을 왜 모르겠는가.
그런데 김주호선생님은 그런데는 이미 관심없어 보였다.
단,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생맥주를 시원하게 벌컥 벌컥 마시고 그냥 멀쩡한 정신으로 집에가고 다음날 무사히 출근할 수 만 있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딱 두잔만 마셨으면 좋겠다고 했다.
두잔...
왜 두 잔이었을까.
난 그냥 알것 같아서 더 묻지 않았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렸다.
첫잔은 건배를 제안하고 벌컥 벌컥 마시고 내려놓은 잔이다.
그리고 큰소리로 "한잔 더"라고 말하고 두번째 잔을 시키고 싶은 마음.
그 말이 두 잔이라는 말로 나왔다고 생각했다.
언젠가 시원하게 맥주 두 잔을 마시는 날이 오길 기다렸다.
26일. 김주호선생님이 돌아가셨다.
갑작스런 부고에 놀라기도 했지만 아무 부담 없이 맥주 두 잔을 못한것이 서운하고 미안하다.
Rest in peace...
2013년 5월 27일 월요일
2013년 5월 18일 토요일
5월 18일
80년 나는 국민학교 5학년이었다.
유독 신문을 많이 보시던 할아버지와 한방을 쓰면서 자연스레 신문을 많이 읽으며 자랐다.
그때는 신문은 한자도 많고 세로쓰기를 했을 때다.
기사가 워낙 어려운 말로 작성되다 보니 어린이인 내가 읽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저 신문이 신기했다.
난 오타를 찾아내거나, 똑같은 글씨인데 조판에 따라 변형되어 보이거나 오래써서 닳아버린 식자판을 상상하는 좋았다.
뉴스에는 나쁜 놈들이 일으킨 폭동이 연일 보도 되었고 그렇게만 믿었다.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봤던 80년 5월의 사진은,
무장한 군인이 피투성이가 된 비무장 상태의 한 청년을 때리기 직전의 모습이었다.
이 사진은 선명한 기억으로 남았다.
언론이 무엇인지도 이 사진을 보는 순간 알았다.
내가 겪은 일이 아니라며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관망하는 내가 한심하다는 것도 알았다.
생각해 보면 80년 광주가 아니라, 88년 5월은 각성하여 다시 태어난 달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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