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7월 15일 화요일

사일런스

 존 케이지의 워터 워크 연주를 보면서, 작곡가이자 퍼포머가 어떤 "청각상징의 상황"을 만들고 있는지 보며 문화적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누군가는 현대음악을 접하면서 나도 할 수 있는것 아닌가라는 질문을 한다. 이것은 마치 모든 예술에 던지는 비예술적 지향으로 살아가는 대다수의 사람에게서 나오는 뻔한 질문이다. 그 대답은 분명해진다. 그럼 너도 예술을 해. 그럼 너도 작곡을 해. 그럼 너도...연주를 하라. 이것이 답이다. 그것을 하는 사람이 예술가고, 그 행위가 예술이기 때문에 그렇다. 존 케이지의 사일런스가 한국에 드디어 출간되었다. 책 자체가 놀라운 행위이기 때문에 꼼꼼히 읽는 다는 것 자체가 그에 대한 숭배가 될 것 같아 조심스럽다. 행위와 비행위, 의도와 비의도를 구분하지 않거나 버리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는가 말이다. 그걸 어떻게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만약, 오늘 점심 메뉴와 동일한 것을 저녁에 또 먹겠냐고 묻는다면 한번쯤 고민해 본다. 하지만 며칠 지난 후 지난 번 그 메뉴가 좋았다면 다시 선택하게 된다. 이건 마치 선택적으로 듣는 음악과 같다. 모짜르트냐 말러냐를 선택하는 것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비정형화되었지만 선형성에 기반을 둔 현대음악을 듣는 다는 것은 오늘 점심에 먹은 짜장면을 저녁과 야식으로 선택한다고 해도 배를 채우는데는 아무 문제가 없다는 태도를 갖거나, 기억을 깨끗하게 비워내는 가상의 상황속에서 선택한 짜장면을 먹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혹적인가. 위치가 정해지면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커진다. 사일런스를 읽으면서 계속 머리속을 맴돈다. 인간이 지구에 살고 있으며, 청력이 살아 있는 한 단 한순간도 침묵상태를 무음의 상태로 만들 순 없다. 그렇게 노이즈를 개념화한다면, 노이즈는 듣고 싶지 않은데 존재하는 썸띵으로 밖엔 설명할 수 없겠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 선택적 청취가 가능하기 때문에 그것이 연극적 요소로써 음악이 된다는 건 놀라운거다.